서울특별시에서 1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강남의 잠전초등학교와 강월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3학년 때 조기 유학 열풍을 타고 호주 브리즈번으로 유학을 갔다가 IMF 사태로 인해 3년 만에 귀국한 후 모델학원에 등록하여 음료·과자·통신사 등 CF, 잡지 모델로 활동했다. 1999년 영화《여고괴담 2》로 연기자로 데뷔, 이후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종횡무진하며 배우로서 많은 활약을 펼쳤다.
1999년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에서 연기자로 데뷔하였고, 2000년 《가문의 영광》으로 시트콤 장르에도 데뷔했다. 2001년 SBS 《화려한 시절》에서 장철진(류승범 분)을 짝사랑하는 버스차장역으로 분해 코믹한 연기를 소화하였으며, MBC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에서는 발랄한 치어리더 역으로로, 영화 《품행제로》에서는 박중필(류승범 분)을 짝사랑하는 불량학생으로 출연했다.
이후 공효진은 코믹한 연기에서 잠시 벗어나 2003년 처제와 형부의 사랑이야기라는 파격적인 소재를 내세운 드라마 《눈사람》에서 극 중 형부를 사랑하는 처제 '서연욱'역으로 진지한 감성연기를 선보여 많은 화제를 낳았다. 이어 곧바로 출연한 《상두야 학교가자》에서는 드라마에 첫 데뷔한 비와 함께 극을 훌륭히 이끌어 나갔다는 평가를 받았고, 《건빵선생과 별사탕》에서는 공유와 티격태격하며 사랑을 키워나가는 '나보리' 역으로 본격적으로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서 활약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중간에 슬럼프가 찾아오며 잠시 작품활동을 쉬기도 했으나 영화 《가족의 탄생》으로 슬럼프를 극복하였고, 《미쓰 홍당무》에서는 안면홍조증 선생님 역으로 열연하여 대한민국영화대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2007년 드라마 《고맙습니다》에서는 따뜻한 감성연기로 다시 주목 받았고, 3년 만에 다시 브라운관에 돌아와 《파스타》라는 작품에서 비로소 로코퀸으로서의 입지를 굳혀 나갔다.
이듬해 2011년 차승원과 함께 출연하여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 《최고의 사랑》에서 '구애정'역으로 많은 사랑을 받으며 MBC에서 했던 드라마들이 줄줄이 성공하였고 동시에 평소 관심이 많았던 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저서 《공효진의 공책》을 내놓기도 하며 작가로도 데뷔했다. 오랜만에 SBS《주군의 태양》으로 복귀한 공효진은 귀신을 보는 여자 '태공실' 역을 연기하며 상대 배우인 소지섭과 특유의 케미를 선보였다. 같은 방송사에서 진행한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에서는 정신과 의사 '지해수' 역을 훌륭히 소화해냈고, 이후 곧바로 드라마 《프로듀사》에서 쌈닭 음악PD '탁예진' 역으로 3연타에 성공했다. 다시 SBS로 돌아와 드라마 《질투의 화신》에서 생계형 기상캐스터 '표나리' 역을 맡아 열연하였고 많은 사랑을 받으며 명실상부 브라운관 최고의 로맨틱 코미디 배우로 자리매김 했다. 꾸준히 많은 드라마에 출연하였고 실패한 드라마가 거의 전무할정도로 작품 보는 눈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개봉한 영화 《미씽》에서는 중국인 보모 역으로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주었고, 로코만 할 수 있다는 편견을 깨며 호평을 받았다.
올바른 방향을 잡아주는 역할의 '나침반' 같은 기자가 되고 싶다는 성신여대 노지민(중어중문학 08) 양. 대학 진학 후 방송기자가 되기 위해 학교 방송국에서 '1인 제작 체제' 경험을 쌓은 그녀는 오늘도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 특별히 방송기자를 꿈꾸게 된 이유가 있다면?
▲ 뭔가를 찾아내고 파고드는 걸 좋아해요. 여러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취재하는 일 자체도 좋구요. 무엇보다 날 통해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대해 알아간다는 자체가 아주 매력적입니다.
- 꿈을 위해 활동한 경험이 있다면?
▲ 처음엔 '방송기자'라는 목표가 있던 게 아니고 '방송' 자체가 좋아 시작했습니다. 성신여대 방송국은 부서가 나눠져 있지 않고 한 사람이 오디오와 영상 방송 모두를 기획부터 제작, 편집, 진행까지 하는 '1인 제작 체제'거든요. 자연히 취재활동도 많이 하고 언젠가부터 '기자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머리 속에 자리잡게 됐습니다.
특히 실전경험에 중점을 두고 오디오 프로그램을 편성할 때 시사 관련 프로그램을 하나라도 더 맡아 진행했습니다. 방송에 적합한 소재를 찾으려면 당연히 여러 분야에 대해 항상 새로운 소식들을 체크해야 하고 정해진 소재에 대해 깊이 있는 취재를 하기 위해 외부 인사들을 만나기도 했고요.
방송을 직접 진행하다보니까 방송기자로서 필요한 기본적인 아나운싱도 익힐 수 있어요. 방송국 활동기간 동안 다른 친구들에 비해 하지 못한 부분도 많았지만 그만큼 내가 처한 상황 속에서 뭔가를 얻기 위한 노력이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 방송기자 중 롤 모델로 혹은 좋아하는 인물이 있다면?
▲ MBC의 김재용 기자요. 김재용 기자의 뉴스들을 보면 대중문화의 동향이 쏙쏙 들어와요. 같은 내용이더라도 시청자가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뉴스가 참 좋습니다.
- 앞으로 어떤 방송기자가 되고 싶은가?
▲ '나침반'같은 기자가 되고 싶습니다. 우리 사회의 흐름과 방향을 집어줄 수 있는 뉴스들을 전달하고 싶어요.
본명: 김소정 (金韶情)
생년월일: 1995년 12월 7일 (23세)
출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은평구 구파발동
학력: 성신여자대학교 미디어영상연기학과 (재학)
포지션: 리더, 서브보컬
활동기간: 2015년 1월 16일 ~
유주
본명: 최유나
생년월일: 1997년 10월 4일 (21세)
출생지: 대한민국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학력: 성신여자대학교 현대실용음악학과 (재학)
포지션: 메인보컬
활동기간: 2015년 1월 16일 ~
예린
이름: 정예린 (鄭睿隣)
생년월일: 1996년 8월 19일 (22세)
출생지: 대한민국 인천광역시 계양구 효성동
학력: 서울공연예술고등학교 실용음악과 (졸업)
포지션: 서브보컬, 리드댄서
활동기간: 2015년 1월 16일 ~
신비
본명: 황은비 (黃恩妃)
생년월일: 1998년 6월 3일 (20세)
출생지: 대한민국 충청북도 청주시
학력: 서울공연예술고등학교 실용무용과 (졸업)
포지션: 서브보컬, 메인댄서
활동기간: 2015년 1월 16일 ~
은하
본명: 정은비 (丁恩妃)
생년월일: 1997년 5월 30일 (21세)
출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금천구
학력: 서울공연예술고등학교 무대미술과 (졸업)
포지션: 리드보컬
활동기간: 2015년 1월 16일 ~
엄지
본명: 김예원
생년월일: 1998년 8월 19일 (20세)
출생지: 대한민국 인천광역시 연수구 옥련동
학력: 서울공연예술고등학교 연기예술과 (졸업)
포지션: 서브보컬
활동기간: 2015년 1월 16일 ~
여자친구 데뷔전 각 멤버 활동
소원 : 5년 정도 연습생 생활을 했다. 처음에는 DSP미디어에서 연습생 생활을 시작하여 3년 6개월 간 트레이닝을 받았다. DSP미디어 연습생 시절, 선배 가수들의 뮤직비디오 및 리얼리티 등에[75] 출연하기도 했으나, 데뷔 일정이 계속 밀린 끝에 DSP미디어에서 쏘스뮤직으로 이적했다. 이후 다시 1년 6개월간의 트레이닝을 받고 여자친구의 리더로 데뷔에 성공했다. 예린과 더불어 여자친구 데뷔조에 맨 처음 들어온 멤버이다.
예린 : 3년 정도 연습생 생활을 했다. 판타지오에 2년간 있다가 지금 회사에 들어왔다. 지금 회사에 처음 들어온 직후에는 GLAM을 키우고 있었는데 여자친구 후보군으로는 소원과 단 둘 뿐이었고 이후 후보군 연습생들이 하나 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소원과 더불어 여자친구 데뷔조에 맨 처음 들어온 멤버이다.
은하 : 가수는 3년 준비를 했다. 이미 12세 때부터 아역 배우/모델 활동을 하며 노래와 춤을 연습하기도 했었다. 한때 부모님 반대로 잠시 쉰 후 빅히트엔터테인먼트에서 연습을 한 후 지금의 기획사로 들어와 데뷔 바로 직전 3명의 탈퇴로 데뷔에 빨간 불이 켜진 여자친구의 긴급합류해 데뷔에 성공했다. 여자친구 데뷔조에 맨 늦게 들어온 멤버이다.
유주 : 3년 준비를 했다. 중1 때부터 각종 노래 대회에서 수상을 해 본격적으로 가수의 길을 걷기 위해 보컬학원을 다녔고, 큐브 엔터테인먼트와 로엔 엔터테인먼트에서 연습생 생활을 하다 지금의 회사로 옮겼다. 한 때 JYP 엔터테인먼트 입사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같이 입사시험을 치른 사람 중에서는 예린언니의 절친도 있었다.
신비 : 4년 연습생 생활을 했다. 불후의 명곡에서 밝힌 바로는 초등학교 6학년 시절부터 가수 연습생을 시작했다고 한다. 사실은 10년이라 카더라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가수를 꿈꾸며 댄스팀에 들어갔고, TV 방송에도 출연했다. 은하보다 먼저 빅히트엔터테인먼트를 떠난 후 로엔 엔터테인먼트에서 연습생 생활을 한 후 지금 회사로 이적해 2년 정도 함께 했다.
엄지 : 지금의 회사가 첫 회사다. 현재 멤버들과 함께 데뷔 때까지 1년 정도 연습했다.
2015년 1월 16일에 데뷔한 대한민국의 6인조 걸그룹. 2015년 1월 15일에 데뷔 앨범 Season of Glass을 발매하였으며, 방송데뷔 무대는 1월 16일 KBS 뮤직뱅크에서 타이틀 곡 <유리구슬 (Glass Bead)>로 가졌다.
미국 빌보드는 여자친구를 '2015년 주목해야 할 K팝 아티스트 TOP 5에 선정했다.
여자친구는 '우리가 꿈꿔온 소녀들'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청순형 아이돌을 지향하는 걸그룹이다. 소성진 쏘스뮤직 대표는 "대형 기획사가 아닌 상태에서 대중에게 빨리 알리고픈 마음에 꼭 한글 이름을 쓰고 싶었다. 그리고 동방신기, 원더걸스, 2NE1, 걸스데이, 에이핑크 등 네 글자 팀이 인기가 많다. 남자 팬들한테도, 여자 팬들한테도 다 친숙할 것 같은 느낌도 좋았다"라고 밝힌 바 있다.[7] 그리고 탈락한 이름에는 허그허그, 세계평화, 수호천사, 가디언엔젤 등이 있었다고 한다. 여자친구라는 이름은 남자들에게는 사랑스러운 여자친구, 여자들에게는 모든 걸 터놓을 수 있는 친한 여자친구가 되고 싶다는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늘 함께 하는 친구처럼 좋은 음악으로 대중들 곁에 영원히 남고 싶다는 바람을 담은 이름이기도 하다.
기본적인 인사는 '둘 셋 안녕하세요! 여자친구입니다~!'이며, 엔딩 멘트는 '지금까지 여자친구였습니다, 감사합니다!'이다.
한지민의 어릴 적 꿈은 의사였다. 이유는 조부모가 한지민은 의사, 언니는 성악가 됐으면 좋겠다고 하여서 조부모를 행복하게 해드리고 싶어 중학교 때까지는 장래희망이 막연히 의사였다고 한다. 하지만 사실 무엇보다 당시 편찮던 할머니를 치료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컸었다고. 한지민의 할머니는 심장병 수술을 해서 몸이 불편하고, 할아버지는 암 투병으로 고생하다 사망하였다. 아이들도 너무 좋아해 유치원 선생님을 꿈꾸기도 했고, 노인복지에 관심이 많아서 사회복지사의 꿈을 키우기도 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예쁜 얼굴로 유명했다. 졸업사진. 얼굴도 예쁜 데다 공부도 잘하고, 리더십도 있어서 초등학교 때부터 반장, 부반장 등 임원직도 쭈욱 하면서 선생님들한테도 많은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당시 별명은 토끼였는데, 이유는 당시 앞니가 토끼처럼 돌출되서였는데, 초등학교 때 교정을 했다고 한다.
한지민이 나온 서문여자고등학교 후배들의 말에 의하면 한지민을 가르쳤던 선생님들마다 그렇게 칭찬을 했다고 전해진다. 공부도 잘하고, 예쁜 얼굴만큼 마음씨도 예쁘다며 극찬했다.
그녀의 데뷔는 우연한 기회에 이루어졌는데 첫 소속사 대표의 제부가 한지민의 중학교 3학년 시절 체육 교사로 그녀를 추천했다. (처제가 연예계 쪽에서 일을 했단다.) 미모가 단연 군계일학이었던 듯. 해태음료 '네버스탑'이라는 광고(1998년)이다.
중학교 때 CF로 연예계에 데뷔를하지만 적극적인 활동은 안 하고, 잡지모델, 광고모델 등만 활동을 하는데 그 이유는 본인의 확고한 의지 때문이었다. 중고등학교 학창시절의 추억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시간이라고 생각해서 연예활동은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학교생활에 비교적 덜 지장을 주는 잡지모델과 광고모델 위주로만 활동한다. 만약 부득이하게 오전에 촬영이 있을 때는 학교에서 허락을 받고, 촬영 후에는 다시 학교에 돌아와서 수업을 받고 보충수업도 빼먹지 않았단다. 한지민이 본격적으로 연예계 활동을 하게 된 건 대학입학 이후이다.
그런데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한지민의 첫 모델 데뷔는 참고서 모델이었다.
데뷔 전인 2002년 12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선 후보 광고에 나온 적도 있다.
2003년 1월 《올인》에서 송혜교의 아역으로 안방극장에 데뷔했다. 이때 비하인드 스토리가 상당히 흥미롭다. 한지민에게 아역 오디션 제의가 들어왔으나 오디션 당일은 가족들과 처음 가는 해외 여행날이어서, 한지민은 결국 오디션을 포기하고 가족 여행을 갔다. 그러나 제작사 측에서는 500:1 경쟁률에도 배우를 선택하지 않고, 정식배우 경험이 없고, 오디션도 보지 않은 한지민에게 계속 러브콜을 보냈다.
열애설은 딱히 나온게 없네요~~~
한지민 선행
부모님이 부대 안에서 식당을 하셔서인지 군인들이 고생한다는 걸 어릴 때부터 많이 들었던 모양. 정확히는 2001년부터
2005년까지 서산에 위치한 공군부대 내에서 식당+호프 같은 것을 했다. 한 번은 와서 즉석 사인회를 하기도 했다. 물론 군인들은
일부를 제외하곤 전혀 몰랐고 당시 부대 안에 살던 관사가족들이 다 받아갔다. 애초에 식당 위치가 관사가족 아파트 쪽이라...
군인들을 위해 이런 일도 한다.
2018년 6월 6일 제63회 현충일 추념식에서 추모 헌시[22]를 낭송하여 화제가 되었다. 모두 낭독하는 데만 5분이 걸릴 정도로 꽤 긴 시임에도 불구하고 들고 있던 노트를 거의 보지 않고 차분한 목소리로 낭송하여 본인의 행사 준비에 들인 정성을 보여주었다. 덕분에 행사에 참여한 유족들과 시민들에게서 시 내용이 잘 전달되었다는 호평을 받았다.
1일 강제추행 등 혐의로 기소된 안 전 지사에 대한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1심과 달리 징역 3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했다.
서울대학교 사법학과 출신인 홍동기 부장판사는 제32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연수원(22기)을 거쳐 서울지법 판사로 임관했다. 이후 법원행정처 공보관을 거쳐 서울동부지법, 서울중앙지법, 광주고법 부장판사 등을 지냈다.
홍 부장판사는 지난 2011년 대법원장의 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대법원 공보관을 맡은 이력이 있다. 당시 임기 말이었던 이용훈 전 대법원장 시절 공보관으로 보임돼 그 해 9월 취임한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임기 초까지 공보 업무를 맡았다.
홍 부장판사는 지난 2015년 광주고법에 있을 당시 광주지방변호사협회가 선정하는 우수·친절 법관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광주변협은 “공정하고 신속한 재판진행과 사건의 실체파악을 위하여 노력하며, 입증에 충분한 기회를 주고 소송당사자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자세가 좋다”고 평가했다.
2017년 2월부터 성폭력 전담부인 서울고법 형사12부 재판장을 맡아오고 있는 홍 부장판사는 원칙에 충실함과 동시에 법리에 밝은 법관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는 지난해 1월 서울고법 형사12부를 성폭력 사건 재판과정에서 피해자 인권을 보장하는데 기여한 ‘디딤돌’로 선정했다.
동료 법관들로부터 사회성이 좋다고 평가받는 홍 부장판사는 현 재판부에서 성폭력 사건을 전담하면서 때로는 반성하지 않는 피고인에게 호통하는 단호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실제 홍 부장판사는 이날 안 전 지사에게 실형을 선고하면서 "피고인은 도의적, 정치적, 사회적 책임은 있지만 법적 책임은 이유 없다며 범행을 부인하고, 그로 인해 피해자가 당심까지 출석해 피해사실을 회상하고 진술해야 했다"고 질책했다. 또 "안 전 지사는 현직 도지사이자 여당 대권주자로서 수행비서 및 정무비서로 자신의 보호감독을 받는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위력으로 간음과 강제추행을 했다"고 지적했다.
앞서 홍 부장판사는 지난해 '인천 여고생 감금 폭행 사건'에서는 가해자 20대 남성에게 1심과 같이 징역 5년을 선고하기도 했다. 당시 재판부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잔혹하고 변태적이며 올바른 성 정체성과 가치성이 확립되지 않은 미성년자를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는 수단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비난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질책했다.
또 동성 제자를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유명 성악가 권모씨에 대한 항소심에서는 징역 7년을 선고한 1심과 달리 징역 6년을 선고한 바 있다. 1심은 권씨 혐의를 전부 유죄로 인정하고 징역 7년을 선고한 반면 2심에서는 피해자 동생에 대한 범행 중 일부는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보고 일부 감형했다.
1986년 연극배우 첫 데뷔하였고 이후 1991년 KBS 대학개그제에서 양원경과 함께 대상을 수상하며 정식 데뷔하였다. 호빵맨, 화려한 골반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한때 김국진과 콤비를 이루며 이후에 데뷔한 서경석, 이윤석과 함께 1990년대 최고의 명콤비로 인기를 얻었다. 콤비로 활동했던 김국진에 비해 인기를 얻지 못하다가 2002년부터 2005년까지 방송한 《일요일 일요일 밤에 - 브레인 서바이버》MC로 인기의 최고점을 찍었다. 《일요일 일요일 밤에》〈건강보감〉, 〈대단한 도전〉, 이경규 김용만의 라인업에서 이경규와 콤비를 이뤄 난투극 연출로 많은 웃음을 줬다.
제1회 KBS 대학개그제에서 대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참고로 같이 대상을 탔던 사람은 양원경. 동기로 감자골 4인방인 김국진, 박수홍, 김수용과 유재석, 남희석 등이 있다.
<한바탕 웃음으로> 등 KBS 개그 프로그램에서 모습을 보였으나, 희극인실 선배들과의 마찰로 김국진, 김수용, 박수홍 등과 함께 자진 방출의 길을 택했다.(일명 감자골 4인방) 이후 김국진과 미국으로 도피성 유학을 마치고 MBC로 복귀.
데뷔초에는 개그맨으로도 꽤 웃겼다. 그러나 데뷔하고 조금 지나고부터 피디들이 꽁트뿐만 아니라 진행하는 코너나 역할을 조금씩 시켰다. 또 감자골 사건으로 유학을 가게 되고 돌아와서 꽁트연기를 안 한지 오래 되어 특성상 바로 다시 하기 어려운 입장이 되었다. 이러자 개그맨으로서는 출연요청이 잘 안왔다. 하지만 오는 프로그램은 일단 해야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조금 시간이 지나도 적응할 가능성이 높은 MC쪽으로 점점 가게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테마게임 등에서 MC 자질이 드러나며 발탁된다. 특히 MBC로 복귀 후 김국진과 함께 21세기위원회의 MC를 맡게 되었고, 이 프로그램이 당시 1997년 외환 위기 시대상과 절묘하게 맞물린 흥행으로 인해 그가 다시 유명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2000년대 초중반에 브레인 서바이버 MC, 대단한 도전 MC 등에서 큰 인기를 얻으며 MBC 굴지의 예능 MC로 발돋움한다. 당시 MBC 예능을 쥐락펴락했던 이경규에게는 좌용만 우형기가 있었으며, 단독 MC로도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당시 이휘재, 남희석보다 높은 등급의 MC였으며 신동엽과 비슷한 등급이었다. 당시 유재석, 강호동은 MC로 명함도 못 내밀던 시절. MBC 방송연예대상을 몇 차례나 수상하며 승승장구했다.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는 한 해씩 걸러가며 이경규와 김용만이 대상을 나눠먹는 정도였다.
하지만 타 방송국에서는 그다지 좋은 성과를 내지 못했으며 특히 KBS 와는 껄끄러운 사이가 지속되었다. 예를 들어 KBS의 퀴즈 프로그램인 1대 100의 초대 MC를 맡았으나 1년 만에 손범수로 교체되었다. 이후 요즘 들어 이슈 터뜨리는 데 맛들인 모 야구선수 출신 연예인을 대신하여 비타민의 진행을 정은아, 전현무와 함께 맡으면서 다소 나아졌던 듯... 그리고 2012년에는 이야기쇼 두드림의 메인 MC도 맡으면서 KBS에서도 고정으로 2개로 늘어났었다.
김용만은 지난 2008년 1월부터 2011년 5월까지 해외 프로축구 승패에 베팅하는 사설 스포츠토토 등에 총 13억원 상당 판돈을 걸고 상습적으로 불법 도박을 한 혐의로 지난 4월 불구속됐다.
첫 공판에서 검사로부터 징역 1년을 구형 받았다. 당시 김용만은 "매니저 휴대폰으로 온 사설 도박사이트에 관한 문자를 보고 호기심으로 베팅을 시작했다"며 "저를 믿었던 모든 분에게 실망을 안겨드렸다. 특히 사랑하는 큰 가족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줬다.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고, 깊이 뉘우치겠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제거 상처를 준 많은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며 살고 싶다"고 선처를 호소했다.
서울중앙지법 522호 법정에서는 김용만에 대한 선고 공판이 열렸다. 형사8단독 소병석 판사는 김용만에게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 120시간을 선고하며 "김용만이 2년 이상 입출금액 합계 13억3천여만원 상당의 돈으로 도박을 했다"며 "범행 기간과 회수, 금액을 고려할 때 죄질이 무겁다"고 밝혔다. 이어 "김용만이 사회적인 관심을 받는 연예인이자 공인으로서 모범을 보여야 하는데도 범행을 저질러 비난받을 만하다"면서도 "호기심에 도박을 시작한 점, 수사 개시 전에 도박을 중단한 점, 초범이고 그동안 사회봉사와 기부 활동에 참여해온 사항 등을 참작했다"고 덧붙였다.
2004년 5월 30일 ~ 2008년 5월 29일 : 제17대 국회의원 (광주광역시 북구 갑)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위원
열린우리당 부대표
국민연금제도개선특위 위원
열린정책연구원 이사
제17대 국회 운영위원회 위원
제17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위원
2008년 5월 30일 ~ 2012년 5월 29일 : 제18대 국회의원 (광주광역시 북구 갑)
2008년 8월 : 제18대 국회 윤리특별위원회 위원
2008년 8월 : 제18대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간사
제18대 국회 국토해양위원회 위원
제18대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간사
2012년 5월 30일 ~ 2016년 5월 29일 : 제19대 국회의원 (광주광역시 북구 갑)
2012년 6월 ~ 2012년 11월 : 민주통합당 최고위원
2012년 7월 ~ 2016년 5월 : 제19대 국회 정무위원회 위원
2015년 2월 ~ 2015년 7월 : 새정치민주연합 정책위원회 의장
2015년 8월 ~ 2016년 5월 : 제19대 국회 공적연금 강화와 노후빈곤 해소를 위한 특별위원회 위원장
2019년 1월 ~ 현재 :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
강기정은 전라남도 고흥 섬마을에서 아버지 강부흥과 어머니 진소방 사이에서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고흥 금산중앙초등학교와 금산중학교를 마치고 광주 대동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대동고등학교 졸업 후, 전남대학교로 진학했다. 그는 1982년 박관현의 사망일을 맞아 처음 경찰서에 연행된 이후 학생운동계에 투신하게 된다. 전남대 재학 중 1985년 삼민투 위원장 을 지냈다. 5.18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에 참가했다. 1985년 삼민투위원장으로 8년의 실형을 선고 받고 감옥생활을 하였다.
1982년 전남대학교 전기공학과에 입학하여 '사회조사연구회'에서 활동하였다.
1999년 아파트 공동체 연구센터를 조직하였다. 그 뒤 16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그 뒤 희망자활후견기관 관장에 선임되었다.
1985년 전남대학교 삼민투쟁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98년 ‘5월의 빛’이라는 안내 봉사단을 창단하였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광주광역시 북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새천년민주당 박광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2년 박광태가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광주광역시장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대한민국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여 치러진 재보궐선거에서 역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새천년민주당 김상현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의원인 새천년민주당 김상현 후보에 설욕하였다. 이후 열린우리당 복지특별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2007년 말 BBK 특검법 때문에 벌어진 국회 공성전 때 의장석을 점거한 한나라당 의원을 상대로 전화기를 무기로 삼아 대치했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무소속 한화갑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이후 정세균 대표최고위원의 비서실장을 역임하였다.2008년 말 행정안전위에서 당시 법안소위원장이었던 권경석 의원의 개회 선언을 방해하는 과정에서 권 의원의 입을 막고 웃으면서 히스기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2]2009년 7월에는 미디어법 통과 과정에서 몸싸움을 벌이다 한나라당 강승규 의원의 보좌관을 때려, 이 2건으로 벌금 500만원을 선고받았다. 2010년 말에는 4대강 예산안 날치기 시도때 한나라당 김성회 의원과 쌍방 폭력을 행사했다. 육군사관학교 시절 럭비부 주장이었던 김 의원에게 선빵을 날렸는데, 일방적으로 당하고 난 이후 엉뚱하게 자신의 곁에 있던 국회 경위의 얼굴을 무차별 폭행하여, 폭행죄로 벌금 1,000만원을 선고받았으며, 해당 행위로 인한 갑질 논란으로 여론의 많은 비난을 받았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6월부터 12월까지 민주통합당 최고위원을 역임하였다. 2013년 11월 박근혜 대통령의 대한민국 국회의사당 시정연설 후 대통령경호실 차량의 통행방해 및 버스 운전 담당 순경을 뒷통수로 들이받아 논란이 되었는데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2015년 2월부터 7월까지 새정치민주연합 정책위의장을 역임하였다.
더불어민주당에서 강기정 의원의 지역구인 광주 북구 갑 선거구와 광주 서구 을 선거구를 전략공천을 추진할 것으로 보였는데, 컷오프 대상은 아니나 개인 지지도가 너무 낮은 것이 원인인 듯하다. 또한 강기정의 폭력이미지가 워낙에 강한 것도 원인으로 작용했다.그래서 사실상 공천 탈락이 예상되었는데 결국 컷오프되면서 낙천을 당하고 말아 20대 총선에서는 의원직을 유지하지 못했다.
컷오프를 통보받은 직후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에서 신경민 의원에 이어서 9번째로 연설을 하게 되었다. 과거 몸싸움 국회의 중심이 되었던 자신의 모습과 몸싸움이 사라진 현재의 국회를 비교하며 연단에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긍정적으로 평하는 이들 사이에선, 발언 도중에 간간히 한숨으로 한숨 요정과 목사님과 같은 설교투로 인해, 천주교 신자임에도 홀리버스터 중인 강 목사님이라고 통칭되고 있다.
2019년 1월 8일, 신임 정무수석비서관으로 임명되었다. 전임 한병도 수석과 마찬가지로 강 신임 수석도 호남 출신이다.
자유한국당,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정의당은 "친문 색채가 짙어졌다", "친위체제 구축"이라며 일제히 비판적인 논평을 냈으며, 특히 자유한국당은 강 수석이 과거 저질렀던 각종 폭력 행위들에 대해 비판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혼자 '국민과의 소통강화 의지', '국정쇄신 의지 표명'이라고 평가했다.
강기정 전과
현존자동차방화미수, 국가보안법위반,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위반,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위반: 징역 7년, 자격정지 5년 - 1985년 10월 28일 선고
현존건조물방화예비, 국가보안법위반: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 - 1988년 1월 20일 선고, 1988년 12월 21일 특별사면, 1988년 12월 21일 특별사면복권
1957년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태어났다. 청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에 재학하다가 긴급조치 9호 위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출 거부투쟁으로 기소되었다가 1979년 광복절 때 형 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1980년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수배되어 제적되었다. 이후 노동운동에 참여하며 전기기술자로 일하였다. 1990년에야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청주환경운동연합 등에 몸담았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윤경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열린우리당에서 사무부총장, 원내대변인, 정책위원회 부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민주당에서 원내대변인, 원내수석부대표 등을 역임하였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5년부터 새정치민주연합 충청북도당 위원장, 대한민국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고 있다. 그런데 자신의 시집을 피감 기관에 판매하였고 자신의 사무실에 카드단말기를 설치했다는 이유로 여신전문금융업법 위반 아니냐는 의혹을 샀다. 이에 본인이 책임을 지고 2015년 12월 2일,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위원장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2016년 1월 25일, 더불어민주당 윤리심판원에서 당원 자격 정지 6개월이라는 중징계 처분을 받으면서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수 없게 되었는데 노영민 의원은 당의 결정에 승복하고 따르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가 활동하는 지역구였던 청주시 흥덕구에는 저명한 시인인 도종환 의원이 출마하게 됐고, 노영민 전 의원은 도종환 후보의 지원 유세를 다니면서 그의 당선에 일조했다. 2012년 18대 대선 때에는 문재인 후보의 비서실장으로 일했었는데 야인이 된 뒤로는 뉴스에 나오는 일 없이 조용히 문재인 전 대표를 수행하면서 문재인 캠프의 조직본부장직을 맡아 대선 조직들을 총괄하는 중책을 맡았다.
2017년 8월 30일, 중앙일보는 문재인 정부의 첫 주중대사에 내정되었다고 단독 보도하였다. 이에 대해 청와대 측은 "대사 인사는 절차가 남아 있기 때문에 끝날 때까지 보도하면 안된다"며 유감을 표했다.
30일 오후, 주중화인민공화국대사관 특명전권대사로의 공식 내정을 발표했다. 청와대 측은 내정 이유로 "풍부한 정치적 경험과 정무적 감각, 탁월한 협상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새 정부의 외교 정책과 국제관계의 방향에 대하여 높은 이해도와 실행 능력을 갖춘 적임자"라며, "한반도 사드 배치와 경제 제재 등 복잡한 대(對)중국 외교 현안을 원만히 해결하고, 수교 25주년을 맞는 한·중 관계를 보다 공고히 발전시켜 나가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2017년 9월 대사직 수행을 위해 탈당계를 제출했다.
2017년 10월 25일, 문재인 대통령에게 정식으로 신임장을 수여받았다. 청와대는 이날 수여식에 이어진 비공개 환담에서 “처음 중국에 부임하였을 때 걱정이 많았다. 그러나, 그간 강행군을 하며 많은 정부 및 학계 인사들을 만났는데 입장이 바뀐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한·중 관계 발전에 화룡점정을 찍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노심초사하고 있다. 중국 정부 인사가 중국의 고사성어를 인용하여 ‘이목지신(移木之信)(나라(위정자)가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중국 진나라 재상 ‘상앙’ 인용)’고 한데 대해, ‘제구포신(除舊布新)(옛 것은 덮고 새로운 것을 깔자(베풀자)/‘춘추좌씨전’ 인용)’고 대답하며, 한·중 양국이 함께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나가자고 하였다.”고 하였다고 밝혔다.
이처럼 부임 초반에는 잡음도 제법 있었지만, 10월 말 우리나라와 중국이 사드 갈등에서 벗어나 교류 회복에 합의하면서, 그 과정에서의 역할이 뒤늦게 조명받게 되었다. 주로 중국 내 고위층들과의 소통, 신뢰 구축에 주력했다는 후문. 그리고 단기간 만에 4강 대사로서의 존재감을 얻은 것은 덤.
2017년 12월 5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신임장 제정식 때 방명록에다 '만절필동 공창미래'(萬折必東 共創未來)라는 말을 썼는데 보수 진영은 '만절필동'이란 말을 두고 '천자에 충성을 하겠다'는 의미라고 주장하며 노영민 대사를 맹렬히 비판했다.
1990년 12월 11일 김효정이라는 이름으로 인천광역시에서 태어났다. 2녀 중 장녀로 3년 차이 여동생 김혜정이 있고 동생은 미술을 전공했다. 어머님은 교회 장로며 효린의 아버지는 대한민국 해병대 장교다. 이 때문에 어린 시절에 통금 시간이 있었다고 한다.
효린은 방송상에서나 평상시에 보이는 활발하고 건강한 이미지와 달리, 병약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4.2kg의 우량아로 태어났으나, 알고 보니 뱃속에 복수가 차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효린은 태어나자마자 인큐베이터로 들어갔다. 병명은 희귀병인 담도폐쇄증과 1년 뒤에는 장중첩증에 걸리는 바람에 두 번의 큰 개복 수술을 받았다. 여러모로 험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로 인해 효린은 신체 장기 중에 쓸개와 맹장이 없으며, 개복 수술로 인한 흉터가 배에 남아 있어서 비키니를 아예 못 입는다고 한다. 그래서 효린의 소원이 비키니를 떳떳하게 입는 것이었다고 한다. 태어날 때부터 건강하지 못한 탓에, 가족들의 관심은 항상 효린에게 쏠려 있었다. 이후 데뷔하고 첫 방송 했을 때 할머니가 전화해서 엄청 우셨다고 한다. 그 때 다 죽어가던 애가 지금 이렇게 나와서 춤추고 노래하는 게 너무 대견하시다고. 지금은 뭐, 말도 안 되게 건강하다고 한다.
효린은 초등학생 때 육상선수로 활약할 정도로 건강함을 뽐냈다. 중학교에 입학해서도 체육 시간에 활약하는(피구 1등!) 여학생이었으며 지휘상도 받으면서 음악에 재능을 보였다. 현재 씨스타가 지닌 ‘체육돌’ 이미지와 ‘건강한 섹시미’ 이미지의 가능성을 일찍부터 보여 왔던 효린은 아육대에서도 좋은 경기력을 보여 준다.
JYP 공채 2기 1위로 합격, 데뷔 무산으로 스타쉽에서 데뷔
효린은 어렸을 적부터 막연하게 가수가 되고 싶어했으나, 집안 환경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어서 학원 다닐 생각도 없었다고 한다. 그저 실용음악과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기획사에 들어간다면 좋겠다는 생각에 오디션을 보았고 JYP를 선택한 것도 연말에 갑자기 오디션을 보려니 다른 회사는 다 끝나 있어 간신히 찾은 기회가 JYP였다고 한다. 고등학교 3학년 때 JYP엔터테인먼트 오디션에 급하게 지원해 인피니트의 호야, AOA의 초아, EXID의 하니가 있었던 2기 공채에 1등으로 합격한 후 연습생 생활을 하였다. 이 때부터 노래를 제대로 배우기 시작했다. JYP에서 연습생으로 지내며 여러 선생님들도 만났는데, 그 중 헤리티지의 임효찬은 흑인 음악을 좋아했었고 효린이 정말로 좋아하는 음악을 알게 해줬다. 당시 JYP 연습생이던 시크릿의 송지은, 베스티의 정유지와 함께 3인조로 'JYP 빅마마'로 데뷔할 뻔했으나 무산되고 각자의 길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후 스타쉽엔터테인먼트 오디션에서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의 〈Hurt〉를 불러 합격했다.효린, Hurt 참고로 효린은 연습생 시절 솔리드의 전 멤버인 김조한으로부터 발성과 호흡법을 레슨을 받았다.
발라드부터 댄스, R&B, 재즈와 힙합까지 소화해 내는 정상급 가창력의 소유자
비욘세를 생각나게 하는 스타일의 파워보컬. 성량과 파워, 음색, 가창력, 호흡조절, 완급조절, 감정표현 모두 수준급으로 굉장한 극찬을 받으며, 소화하는 장르도 댄스, 발라드, 알앤비, 힙합(랩) 등을 가리지 않고 두루두루 깔끔하게 소화해낸다.
특히 노래 좀 한다는 쟁쟁한 아이돌 보컬들이 썰리던 "불후의 명곡 2"에서는 존재감을 확실히 알리고 레전드 무대들을 여럿 만들어내면서 가창력을 뚜렷하게 인정받았다.
보컬로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간드러짐과 허스키함을 오가는 음색. 다양한 장르를 소화할수 있는 음색으로 본인의 곡 해석력이 뒷받침되어 많은 장르의 곡들을 탄탄한 라이브로 들려준다. 이러한 음색을 바탕으로, 보컬의 굵기를 자유자재로 조절해 음색의 전환으로 곡을 다양한 스타일로 해석해 다채롭게 한다. 특히 R&B를 부를 때 이러한 본인의 음색이 곡의 섬세한 표현에 있어서 빛을 발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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